바빌론은 영화를 전공했거나 평소에 영화라는 장르 자체를 좋아하는 팬이면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감독의 이전 작품을 생각하고 봤다가는 적나라하고 다소 크로테스크한 장면과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으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거나 지루함을 느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화를 사랑한 라라랜드 감독의 신작
영화 제목 바빌론은 1920년대 할리우드를 지칭하던 표현입니다. 바빌론은 성경에서 신에게 닿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다가 멸망한 고대도시입니다. 화려하지만 위태롭던 당시 할리우드의 모습은 마치 바빌론과 같았습니다.
바빌론의 감독은 우리나라에서도 378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사랑을 받은 영화 라라랜드의 데이미언 셔젤이 맡았습니다. 위플래시, 클로버필드 10번지, 퍼스트맨 등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감각적인 작품을 그동안 선보였습니다.
바빌론은 감독이 오래전부터 기획을 했던 작품이지만 무성영화를 제작하던 할리우드가 주 배경이라는 마이너한 설정 때문에 제작할 수 있는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국내에서는 아바타2-물의 길과 개봉 시기가 겹치며 흥행에는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국내 기준 21만명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평점 8.39를 기록하며 실제 관람객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무성영화 시대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잭 콘래드는 브래드 피트,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지망생 넬리 라로이는 마고로비, 영화를 동경하던 순수한 청년 매니 토레스는 디에고 칼바, 트럼펫 연주가 시드니 팔머는 조반 아데포가 연기했습니다. 영화 후반부 등장해 충격을 준 갱스터 제임스 맥케이는 토비 맥과이어가 맡았습니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잭 콘래드 역은 무성영화 시대를 풍미한 존 길버트 배우를 모티브로 했으며, 넬리 라로이 캐릭터는 배우 클라라 보우의 모습을 보고 만들었습니다.
황량한 사막 위 예술에 대한 사랑이 불타던 시대
영화의 초반은 잭 콘래드가 개최한 광란의 파티 장소가 보여집니다. 실제로도 배우, 감독 등 영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낮에는 영화를 촬영하고, 밤에는 모여서 파티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모여있다 보니 기회를 잡기 위한 배우 지망생들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넬리 라로이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운 좋게 기회를 잡은 그녀는 다음 날 사막 위에 수 십 개에 세트가 지어진 촬영장에 등장합니다. 감독이 원하던 비주얼이 아니었으나 대체 배우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촬영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감독의 디렉션을 마치 스펀지처럼 흡수해 연기하는 넬리 라로이의 모습에 제작진은 크게 만족하고 작품의 성공으로 그녀는 깜짝 스타로 떠오릅니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청년 매니 토레스는 잭 콘래드의 잔심부름을 하다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금씩 기회를 얻습니다. 그러다 시드니 팔머의 조언을 반영해 촬영한 영화가 흥행을 하며 그는 그토록 바라던 영화 제작자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 사이 할리우드가 영화 시스템도 점차 변화했습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붉은 햇빛을 조명삼아 촬영하던 방식에서 탈피해 세트장에서 촬영을 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촬영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유성영화의 등장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표정연기만 하던 배우들은 이제 연극배우와 똑같이 대사를 외우고 감정을 실어 전해야만 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유성영화의 등장
중간에 영화 '사랑을 비를 타고'를 촬영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1920년대 할리우드에 유성영화의 시대가 왔음을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잭 콘래드, 넬리 라로이 역시 유성영화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 생각해 적응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세트 뒤편에서 긴 줄의 대사를 외우느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초조해하는 넬리 라로이의 모습이 이를 보여줍니다. 재밌는 건 당시는 세트장만 지어졌을 뿐 모든 것이 어설픈 과도기였습니다. 카메라의 소음이 너무 컸기 때문에 잡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카메라맨과 카메라는 박스 안에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성영화 두 스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 제작진이 보기에는 구시대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감독들이 캐스팅하려 줄을 섰던 잭 콘래드는 점차 출연할 기회가 줄어들어 쓰레기 같은 작품만 하고 되고, 자신이 도와주었던 영화 평론가는 잡지에서 악평을 쏟았습니다.
이를 알게 된 잭 콘래드가 따지자 평론가는 그의 연기가 시대를 따라잡기에는 늦었지만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를 다시 찬찬사를 보낼 날이 올 것이라고 말을 건넵니다. 잭 콘래드는 비로소 이제 그토록 그가 사랑하던 할리우드에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되고 쓸쓸한 퇴장으로 인생의 막을 내립니다.
섹스어필로 스타가 된 넬리 라로이는 자신이 가진 위태로운 마음을 도박과 마약 의존하며 무너집니다. 어떻게든 그녀를 재기시키려 애쓴 매니 토레스는 제임스 맥케이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할리우드를 떠납니다. 한물 간 스타 넬리 라로이 부고 소식은 신문에 조그맣게 실릴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 가족과 함께 할리우드를 다시 찾은 매니 토레스는 극장에 앉아 청춘 시절 열정을 다 바쳤던 영화를 보면서 바빌론은 끝이 납니다.
영화를 본 후 '샤프의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화려한 할리우드에서 가장 빛나던 스타들이 쓸쓸하게 져버리는 과정이 과거에 대비되며 더욱 슬픈 감정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