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보는 배우 이병헌의 카리스마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2023년 8월 개봉한 영화로 관객수 약 340만 명을 기록하며 괜찮은 스크린 성적을 거둔 작품입니다. 연기만큼은 믿고 보는 이병헌 배우를 필두로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등이 등장해 몰입감이 있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엄태화 감독이 연출을 맡았는데 필모그래피에서 크게 두드러진 작품은 없으나 엄태구 배우와 형제관계입니다.
작품의 흥행에 이어 32회 부일영화상, 43회 황금촬영상, 59회 대종상 등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시각효과상 등 다양한 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지진에도 굳건한 콘크리트를 무너뜨리는 인간의 욕심
영화는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대한민국 많은 서민들의 꿈이었던 아파트 신화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다음 민성(박서준)이 피 묻은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나오며 카메라가 멀어진다. 대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도심 한복판에 더 이상의 아파트 신화는 없다. 그럼에도 생존을 위해 사람들이 의지할 곳은 차갑지만 튼튼한 콘크리트 유토피아 '황궁아파트 103호' 뿐입니다.
마치 거친 바닷속 홀로 솟은 등대를 찾듯 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황궁아파트 103호로 몰립니다. 그중에는 이른바 부자아파트라 불리며 황궁아파트 사람들을 무시했던 드림팰리스 입주민들도 포함돼 있습니다.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의 집에도 추위에 머물 곳이 필요한 엄마와 아이도 찾아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다. 갈수록 떨어지는 식량에 황궁아파트 입주민은 부녀회장 금애(김선영)를 중심으로 외부인 문제 처리를 논의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용기 있게 화재 현장을 진압한 영탁(이병헌)이 만장일치로 주민대표가 됩니다. 주민대표로 외부인 추방하는 첫 번째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한 영탁은 남자 주민들과 함께 방어벽을 설치하고, 바깥으로 나가 식량과 물을 구해옵니다.
처음에는 어리숙하고 수더분해 보이던 영탁은 훌륭하게 주민대표 역할을 수행하지만 점점 강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조지오웰의 소설 동물농장 속 나폴레옹이 떠올랐습니다. 식량은 성과에 따라 분배된다고 하지만 아파트 권력을 쥔 영탁과 부녀회장 그리고 일부에게 더욱 돌아가는 듯 보여집니다. 903호의 딸 혜원(박지후)이 부녀회장 무리가 대립하는 장면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생존의 처절한 모습과는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거리를 두었던 명화에 의해서 영탁의 실체가 밝혀지며 견고할 줄만 알았던 유토피아 황궁아파트 103호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각자도생의 대한민국, 혼자 살아남을 수 밖에
끝까지 버리지 못한 인간의 욕망
콘트리트 유토피아에서 우리 사회를 지탱하던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황폐화된 곳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경찰, 소방, 의료 등 국가의 지원은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동안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던 돈, 명예, 권력 등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이는 영화 초반 민성이 황도 통조림을 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원래라면 단돈 몇천 원이면 구했을 통조림이 오만 원권 지폐를 내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건너고 나서야 통조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소파 밑으로 떨어진 통조림을 꺼내면서 함께 나온 바퀴벌레 떼는 이후 외부인을 대하는 황궁아파트 주민들의 자세를 암시하는 장치로 사용됩니다.
이렇듯 기존 사회를 지탱하던 질서, 규칙은 무의미함에도 아니러니 하게도 아파트 주민들이 끝까지 버리지 못한 것은 바로 '자가'입니다. 주민대표를 뽑을 때 적는 명단이 화면에 보일 때 이름 옆에는 본인 소유의 집인지를 나타내는 '자가'가 표기돼 있습니다.
'자가'야 말로 대한민국 아파트 신화를 있게 한 인간의 욕망이자 콘크리트 유토피아 출입증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 욕망의 상징인 '자가' 여부는 마지막 유토피아 무너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혜원과 명화에 의해 정체가 탄로난 영탁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그가 살인자라거나 주민대표로서 능력이 부족해거나 아닙니다. 바로 그가 유토피아의 출입할 자격인 '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견고한 성은 언제나 안에서부터 무너집니다. 내부 분열이 일어나며 결국 황궁아파트 주민은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지키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합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선을 쫓던 명화도 아파트를 떠나 민성을 잃고 새로운 이들의 도움으로 살아가게 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용두사미
몰입감을 더해 주는 배우들의 연기력, 하지만 힘없이 빠지는 마지막 연출